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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본 미황사

2019년 12월27일자 해남우리신문 '마을공동체 중심엔 여전히 미황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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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01-03 09:54 조회1,4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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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해남의 키워드는 공동체였다] 마을공동체 중심엔 여전히 미황사가 있었다
박태정 기자  |  goguma3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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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30  16: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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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송지면 바닷가 마을사람들의 의지처
이젠 사람, 문화 잇는 해남공동체 중심으로 우뚝

   
▲ 수백년 동안 마을민들의 안식 공간이었던 미황사는 여전히 송지면의 마을공동체 중심에 서 있다.(괘불재 모습)

 미황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간, 지역공동체놀이를 잇고, 다양한 전시회를 통해 문화예술 공간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미황사에서 열리는 축제와 각종 행사의 정신엔 지역공동체 재생이 흐르고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함께 보듬었던 것처럼 치유공간으로서의 역할 또한 크다.
그러한 정신이 녹아있는 사찰이기에 미황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누구나 찾고 싶은 사찰이 됐다. 문학인들이 쉬어가는 곳, 예술인들이 머물다 가는 곳, 산 아래 아이들이 소풍을 오고 지역민들이 농사지은 공양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찾아오는 곳이 미황사다. 
바닷가 마을과 섬마을 주민들은 미황사를 정신적 의지처로 삼아왔다. 지금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주지 금강스님은 매년 연초에 산정, 서정, 어불도 등 5곳의 당제를 주관한다.
이에 미황사 아랫마을인 서정리 청년들은 부처님오신날과 괘불재 때 등줄달기 등을 함께하고 주민들은 공양으로 화답한다. 
미황사의 변화는 1989년 금강스님이 미황사로 오게 되면서부터이고 이후 현공스님이 가세하면서 절이 복원됐다. 수백 년 동안 미황사가 담당했던 지역사회와의 관계도 복원됐다.
미황사 아랫마을 사람들은 모두 미황사와 얽힌 추억을 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소풍을 왔거나 초파일에는 부모님 손잡고 등불을 켜러 왔고, 자라서는 나무를 하러 온 곳이다. 미황사는 현산, 북평, 송지 일대 사람들의 추억이 오롯이 살아있는 곳이다.

서정초등학교 살리기는
지역공동체 살리기였다

미황사 아래에 있는 서정초는 2003년도에 전교생이 5명인 폐교 위기의 분교였다. 옛날에는 사찰이 지역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학교가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금강스님이 서정초등학교 살리기에 나선 이유이다.
금강스님은 농촌의 공동체 재생 차원에서 농촌의 교육환경을 지역사람들의 재능으로 보완하면 학교는 저절로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다. 대안학교 개념이 아닌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보완학교였다.
이에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지역민과 함께하면서 폐교위기의 서정분교는 본교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전국 최초로 미황사 한문학당도 개설했다. 한문학당은 학교나 학원에 매몰된 어린이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물이 있는 자연의 공간에서 농촌아이들과 도시아이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 또한 아이들에게 전통과 자연의 소중함, 서로 소통하는 공동체정신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미황사는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
괘불재는 마을과 사람 이어주고

마을공동체가 사라진 요즘의 농촌, 미황사는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동체복원을 시도해왔다. 지역민이 미황사의 주인이 되고 미황사에서 놀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부처님오신날 어르신 노래자랑이다.
금강스님은 70~80년을 한 곳에서 살아온 사람은 나무에 비하면 거목에 해당하는데, 공동체가 무너져 가면서 사람은 큰 나무가 아니라 고독하고 초라하게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큰 나무에 꽃이 피면 즐겁고 열매 맺으면 따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르신 노래자랑이다. 1년에 1번씩이라도 서로 만나서 노래하고 웃고 하다보면 공동체가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미황사 괘불재도 공동체 살리기 일환으로 시작했다. 금강스님은 괘불재 때 각각 농사지은 것을 재물로 올리고,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을을 묶어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괘불재를 열었다.
괘불재가 열리는 날엔 마을주민들이 1년 농사의 결과물을 괘불에 공양한다. 수행자로서 30여 년을 미황사와 인연을 맺어온 금강스님은 미황사의 존재 이유가 주민들과의 소통 그리고 공동체라고 했다. 

치유의 공간 달마고도의 탄생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한국사회에 미황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로 사고가 확장됐다.
땅끝을 희망을 되찾는 곳, 마음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템플스테이다. 7박8일 동안 수행자들은 땅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내면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템플스테이는 지역을 넘어 전국에서 또 외국인들도 참여한다. 해남을 넘어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사고의 확장은 달마고도 탄생으로 이어졌다. 달마산은 그 승경이 빼어나 진도 쪽 바다에서 보아도 너무 아름다운 산이다. 옛날에는 중국과 인도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많은 이들이 와보고 싶은 산이었다.
금강스님은 산에 사람이 깃들게 하고 싶었다. 12개의 암자와 산 아래 12개의 마을이 수행의 길과 삶의 길로 천 년 역사의 길에서 서로 만나게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길을 걸으면서 휴식과 새로운 힘을 느끼고 담아가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달마고도는 지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쉼과 여유의 길이 됐다.

미황사는 여전히 주민과 함께

미황사는 지역사회를 보듬은 다양한 일을 한다. 송지초·서정초·송호초·송지중·북평중·북일중·현산중에 매년 졸업과 입학 때 장학금을 전달하고 부처님오신날 경로잔치와 어르신 노래자랑,  송지면 독거노인과 노인당에 라면을 전달한다.
월1회 해남교도소에 법문 공양을 하고 있는데, 재소자들이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공동체는 만들어 가는 것
 

금강 주지스님

   
 

 “공동체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미황사라는 공간을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참여해야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또 생활공동체보다는 정신공동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삶을 어른들이 직접 모범을 보이고, 가르쳤을 때 마을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금강스님은 실천하고 참여하는 공동체를 강조했다. 미황사가 하고 있는 일들은 사찰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금강스님은 가장 해보고 싶은 일로 칠순 팔순잔치를 꼽았다. 지역민들의 칠순·팔순잔치를 1달에 1번꼴로 미황사에서 열고 한 사람의 역사를 조명해보자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사진을 전시하고, 동영상을 제작하며, 그 사람의 구술에 의해 인생의 교훈이 될 만한 글과 자녀들에게 평소 부모가 했던 말이나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간단한 문집을 만들고, 화가는 그림을, 가수는 노래로 잔치를 열어주자는 것이다.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잔치를 열면 한 생에 대한 의미부여와 옛날의 공동체 문화도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스님이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했다. 마을공동체의 중심에는 여전히 미황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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